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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 칼럼

로봇이 설교하는 시대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by 길목 2020. 3. 4.

4차산업혁명 시대의 설교를 논하는 제67회 한국실천신학회 정기학술대회가 열렸었다. 그때 흥미로운 주제가 제기되었는데, 로봇이 설교하는 시대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를 다루었다. 지금의 빅데이터 활용과 인공지능이 결합되면, 로봇의 설교가 가능할 것인데, 이를 설교로 볼 수 있을까? 그 학회 세미나에서 양동욱 박사(장신대)는 "인공지능 로봇의 '설교'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고, 인공지능의 이 행위들은 설교가 아닌 정보의 전달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그 이유는 "설교와 예배의 자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간의 인격적인 교류를 통한 존재적 만남의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인공지능 로봇의 설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드러냄이신 계시의 말씀이 될 수도 없고, 영과 영의 만남을 통한 인격적 교류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공지능의 설교는 로봇 안에 내장된 정보의 유출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당연한 지적이고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그럴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설교자 중심, 목회자 중심적 사고가 아닐까? 현실을 부인(?)하는 결론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당장의 기독교의 현실을 바라보면, TV 중계를 통해서 전파되는 설교가 얼마나 많으며, 다른 사람의 설교지문을 읽어 내려가는 표절 설교가 있지 않은가. 이에서 지능적으로 각 단락을 비슷하게 연결하여 외치는 준 표절 설교는 얼마나 많은가. 이 외에도 사람을 통해서 전파되는 설교는 설교문으로 만 존재하여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책으로 제작된 설교문은 컴퓨터를 통해서 읽혀져 많은 감동을 자아내기도 한다.

따라서 이런 문제 앞에서 설교자의 영성(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드러내는)이 어떻게 전파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규명해야 한다. 또 글에도 영성이 깃들여 있을 수 있는가 또 그렇다면 어떤 형태로 깃들어 있는가의 문제도 중요하다. 이렇게 될 때 최초의 설교가 작성될 때(준비할때, 선포될 때)는 더욱 중요해질 텐데, 문제는 이러한 설교형태로만 성도들에게 메시지가 전파되는가 하는 점도 함께 살펴야 할 중요한 요소이다.

결국 설교란 그 메시지를 듣는 청중이 있을 때 유의미한 것 아닌가. 태초의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아닌 이상 설교란 하나님의 그와 같은 행위와 마음, 명령 등을 전하는 중개 행위일 텐데,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계시의 전달은 듣는 사람에게서 결정 나는 것이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개자가 중요하기보다 최초 그 명령을 선포하신 하나님과 최종 전달받게 되는 청중이 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설교자의 영성보다 설교자의 대리성을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왜, 이 부분이 중요하느냐 하면, 거짓 선지자 발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진리를 선포케 하셨고, 독수리를 통해서도 ‘화화화’ 선포의 예언의 메시지를 전파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듣는 이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로 온전하게 들렸을 상황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로봇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읽어 내려갈 때 그것이 설교라 할 수 없겠는가? 논리적으로 어긋나지 않게 성경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선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왜 메시지가 될 수 없는가? 로봇이 오늘날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성경에서 전하는 메시지를 요약해서 뉴스 기사 작성 로봇처럼 인과관계를 명확히 해서 성경에 기록된 메시지를 통일성있게 전파한다면 그 안에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결여된 것인가? 여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전달되는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최초 성령을 통해 이미 기록이 되었고, 그것을 대신 중개하는 것이 설교자일텐데(여기서 성경 기반의 설교가 아닌 직접계시를 통한 메시지 전파라면 모든 논의를 다시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성경이 전파하는 메시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로봇이 예배자로서 서는 문제는 다른 문제이겠지만, 로봇을 통해서 설교가 전파되는 문제는 그것이 설교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에는 동의가 안 된다. 설교학적으로 전통과 역사적인 측면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겠지만, 그러기에는 시대변화가 이전 전통적인 시대와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성경에서 말하는 핵심적인 개념에 대한 이해도 다양하게 발전된 만큼 그리 쉽게 안 된다고 말할 수 없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설교자를 통해서, 그분의 영성 있는 메시지를 한가지 방향으로 듣지 않고, 해석의 과정을 통해서 설교자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메시지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그 과정을 통해 은혜 받았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설교자가 의도하지 않은 그런 ‘오류(?)’의 과정을 통해서 전달된 메시지도 성령의 감동이라고 고백하면 되는 것일까? 그것을 인정하게 되면, 사실 이 논의 자체는 다시 한 번 의미가 없어진다. 위에서 설교자의 영성 문제는 논할 가치가 없는 문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의 계시적 영성을 주장하는 것보다는, 최초 메시지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그것을 듣는 대상인 청중 사이에서 그것을 얼마나 직접적으로 잘 전달하느냐가 설교자의 핵심 기능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로봇은 이 기능에 더 충실히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곧 그런 시대가 올 것이라 예상된다. 인간의 오류는 성경의 메시지를 오히려 더 잘 못 이해하고 잘 선포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평신도가 신학을 하지 않으면, 성경 전체의 메시지에 맞지 않는 어느 한쪽 방향의 의견을 담대하게 선포하고 주장하는 것처럼, 신학을 한 목회자도, 1189장의 성경을 통일적으로 오류 없이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만 개의 관주를 다 외우지도 못한다.

이제 곧 판결을 로봇이 할 것이라고 한다. 오직 객관적으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한 판결을 위해서는 로봇이 더 낫다는 공감대가 많다. 지금은 로봇을 가지고 정보 전달만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지만, 인간과 동일하게 판단하고 감정적 기관을 가지고 있다면 이 문제는 더 심각해지고 로봇의 예배자로서의 고민도 심각해질 것 같다. 하지만 그 전에 아직은 기계로서의 정보 처리 능력에서만 뛰어난 로봇을 가지고 설교가 가능한가의 문제를 따졌을 때, 매우 아쉽게도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말해보고 싶다.

'성언운반일념'. 신학대학원 재학 시절 어느 교수님을 통해서 들은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예전에 24시간 기도의 집 대표인 마이크 비클 목사가, 자기도 1년에 두 세 번 정도 밖에는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에서 선포되는 메시지는 ‘해석된’ ‘증거’의 개념이 강하다. 이마저도 개념이 없는 사람들에게 설교는 그냥 설교문 작성으로 끝나고 읽으면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성언을 운반하지는 못할지언정, 예수님이 부탁하신 복음의 전달자, 증거자가 되는 위치의 설교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그것이라도 할 수 있으면 족하다.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쓰시기로 결정하셨을 때 쓰임 받으면 그러면 된다. 내가 꼭 매 시간 그분의 직접 하시는 말씀을 들어서 선포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교만을 깨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성언운반일념의 정신이 목회자를 교만과 타락으로 이끌고 한국교회를 엉망으로 만들어 사람에게 충성하고 목회자가 선한목자라는 착각을 만들어 내는 것 아닐까.

http://www.thedreamtogether.com/news/articleView.html?idxno=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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