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기독교는 동시대의 변화에 맞게 호흡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회는 이미 많이 변화할것이라고 예고하고 있고, 사회 다방면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는 다소 수동적인 ‘가치보존’에만 머물러 있는 듯 하다.
사회는 고령화 사회, 저출산 시대를 맞이해 국가위원회까지 만들어 10년동안을 준비 하고 각 분야별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전략을 짜고 있는데, 교회는 이 부분에 아무 준비도 하고 있지 않다. 급기야 최근 ‘한국교회 미래지도2’를 출간한 최윤식 박사는 지금부터 준비해야 늦지 않는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교회 생존을 위해 교회마다 위원회를 만들어 다가올 변화의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기민요를 하는 이희문씨는 현대문화의 옷을 입고 민요를 대중의 무대에 올려놓는데 성공했다. 아마 일반적인 경우라면, 민요는 어느 민속잔치에나 가야 겨우 들을 수 있을법 한데, 이희문씨는 한복대신 가발과 하이힐로 컨텐츠를 담고, 국악과 일렉트릭이 섞인 밴드로 대중성을 확보하여 서울 서강대 메리홀에서 공연을 치러냈다. 그의 작품은 국제 예술축제에서도 성황리에 공연이 되었다.
만화가 장태산은 현재 나이가 62세이다. 그는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이름난 만화가였다. 하지만 90년대 말부터 그는 만화계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컴퓨터가 발달되면서 그랬다. 이후 웹툰이 인기를 끌었고, 연필과 펜으로 그리는 그가 적을 둘 곳은 없었다. 그는 웹툰은 만화가 아니라고 생각해 2-30분 이상을 볼 수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33년간 사용해온 연필과 마침내 결별을 고하고 전자펜을 잡았다. 그리고 2년동안 전자펜만 가지고 연습을 한후, 네이버에 웹툰으로 ‘몽홀’이라는 장편을 내놓았다. 그의 작품은 네티즌 평점 10점만점에 9.97점을 기록하고 있다.
경기민요도 그렇고 만화도 사람들에게 소중한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다. 그런데 시대가 빠르게 변하면서 이 변화에 따라오지 못하는 것들은 그 소중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에게 소외되었다. 그런데 기독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부흥기에 가졌던 그 방식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시대에 맞게 변화하지 못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기독교가 가진 가치를 고리타분한 것으로 혹은 신화처럼 여기게 되었다.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김선일 교수가 2014년 11월 한 세미나에서 발표한 연구결과는 다소 충격적이다. 그는 최근 10년이내 회심하여 성실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 266명을 표본으로 하여 다양한 조사를 하였는데, 그중에 어떻게 교회에 나오게 되었는가를 묻는 질문에서 ‘노방전도’를 통해 나오게 된 사람은 단 1명 뿐이었다.
표본이 된 회심자들은 오히려 아는 사람을 통해서 교회에 나오는 비율이 139명으로 가장 높았다. 이 두 경우를 비교해보자면, 아는 사람을 통해서 교회에 나온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이해하고 믿고 나오는 경우가 아닌 관계에 의해서 일단은 교회에 나오고 이후에 믿음을 갖게 되는 귀납적인 경우이다. 반면에 노방전도는 복음으로 접근해서 이해시키고 믿음을 가지고 교회를 선택하게 되는 연역적인 방법이라고 볼수 있다.
노방전도라는 그릇에 복음을 들고 나갔을 때 사람들이 지금은 받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물론 씨뿌리는 자는 눈물로 거두게 될 것을 당연히 믿는다. 하지만 ‘守株待兎(수주대토)’처럼 나무 기둥만을 바라보고 토끼가 잡힐 것을 기다릴수만은 없는 법이다. 그 방법도 하고 새로운 방법도 시행해야 한다. 성과 속이라는 이분법적 가치로 세상을 배제하며 살아가는 시대는 지나갔다. 이 세상에서 통하는 방법을 복음에 접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장신대 이만식 교수가 ‘한지터’의 의뢰로 설문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 대한민국의 10-20대는 종교생활에 관심이 없다고 한다. 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이전 한국교회 부흥의 주역들인 현재 50-70대들뿐이다. 젊은 세대는 자신만의 인터넷 공간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에 현실세계에서의 문제들을 크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유명 가수가 만든 여자의 몸매가 이쁘다는 내용의 가사가 전부인 음악에 열광적으로 반응한다. 그 내용이 별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것을 담고 있는 그릇이 그들에게 이뻐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마음도 없는 그들에게 그들이 싫어하는 그릇에 음식을 내어놓는 것은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다.
교육교회 2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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